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시스코 피사로 (문단 편집) === 삭사이와만 공략전 === 포위가 시작되자 쿠스코의 스페인 정복자들은 잉카군이 점령한 쿠스코의 방위 요새인 '''삭사이와만'''(Sacsayhuamán)[* 훗날 스페인인들이 건축 자재를 마련하기 위해 돌을 가져다 쓴 탓에 훼손되었지만, 요새의 성벽은 아직도 남아있다. 나름 알려진 관광지로 남미 3대 축제 중 하나인 '''인티 라이미'''(Inti Raymi)가 이 근처에서 열린다. 2008년에는 이곳에서 잉카 문명 이전의 것으로 보이는 AD 900~1200년경의 유적이 발굴되기도 했다.]을 점령하기로 했다. 삭사이와만 요새는 쿠스코 공략 및 방어에 있어 전략적 가치가 높은 곳이었다. 공략 첫 날 피사로 가문의 셋째인 후안 피사로가 잉카군 수비대의 투석에 턱을 맞았다. 다음 날에는 턱이 너무 부은 탓에 투구를 쓸 수가 없어서 결국 맨 머리로 전장에 나섰다가 머리에 돌을 맞아 두개골이 골절되었고, 결국 그 부상으로 후안은 '''3일 후에 사망했다.'''[* 죽기 직전 유언장을 작성했다. 원주민 여성에게 얻은 갓난 [[딸]]에게 재산 일부를 남겼지만, 친딸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즉, [[서녀]]를 남긴 것이었다. 또한 아이 [[어머니]]에게 한 푼도 주지 않았고 남은 전 재산은 동생 곤살로에게 남겼다. 하지만 [[먹튀|곤살로도 유언장없이 반란죄로 처형되어서 이 돈은 결국 공중분해되었다.]]] 이 공략전은 처절하기 그지없었기에, 후안 피사로 외에도 숱한 전사자가 발생했다. 어떤 스페인인 병사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전쟁" 이라는 기록까지 남기기도 했는데 이 전투에서는 [[인질]]이나 [[몸값]] 같은 제약이 전혀 없는 상황인데다가, 요새의 중요성을 양측 모두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정사정없는 살육전이 벌어졌다. 스페인측의 기록에 따르면, 잉카인 '''3,000명'''이 전사했으며 요새 주위는 시체로 가득했다고 한다. 잉카 쪽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남은 잉카인들 대다수가 투신자살을 택했으며,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잉카의 어느 지휘관은 화살을 2대나 맞은 상태에서도 끝까지 싸우다가 투신자살을 택했다고 한다.[* 그의 용기에 감탄한 에르난도 피사로가 죽이지 말고 사로잡으라고 명령한 상태였다. 그러나 결국 그가 자살을 택하자 안타까워했다.] 한편, 스페인 측의 피해는 후안 피사로를 포함하여 전사자 4명에 불과했다. 다만, 이 요새를 점령하기 이전에 정찰 등에 나섰다가 사망한 이들이 30명 정도였다고 한다. 어쨌든 정복자들은 삭사이와만 요새를 점령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방어에 필요한 전초기지를 얻게 되었고, 이는 쿠스코 포위전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는 원동력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